
하정우와 류승범이 한 화면에서 부딪힌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고 나니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베를린 두 배우의 연기 대결
두 배우의 연기 방식은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하정우 배우는 릴렉스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본능적으로 힘을 줄 지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연기합니다. 반면 류승범 배우는 메소드 연기를 구사합니다. 촬영 전부터 끝날 때까지 스텝들에게도 말을 아끼며 동명수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방식이에요. 현장에서 류승범 배우가 스텝들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들어 그 긴장 상태를 연기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의 눈빛이 왜 그렇게 서늘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온도 차가 오히려 두 캐릭터의 관계를 실감나게 만든다는 점이었습니다. 종성은 훈련된 침착함을 유지하고 동명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폭발 직전의 긴장을 달고 다니는데, 그게 연기 스타일의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처럼 보였어요. 계산된 연출이 아니라 두 배우의 방식 자체가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긴장감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액션 연출 방식도 눈에 띄었습니다. 감독은 핸드헬드 기법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어요. 여기서 핸드헬드 기법이란 <본> 시리즈 이후 첩보 액션 영화들이 너무 많이 사용하면서 일종의 클리셰가 된 방식 대신, 카메라를 고정한 상태에서 액션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픽스 방식인데 이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액션 장면들이 선명하고 명확하게 읽혔습니다. 표종성의 격투 장면에서 ITF 태권도 기반도 사용되었지요. 손날과 주먹 동작이 뚜렷하게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ITF 태권도란 국제태권도연맹 방식의 태권도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WTF 방식과 달리 발 기술뿐 아니라 주먹과 손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화에서 표종성의 격투 스타일이 이를 기반으로 설계됐습니다.
두 배우의 연기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화려한 액션이 아니었습니다. 총도 다 떨어지고 명분도 사라진 갈대밭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걷는 그 조용한 순간이, 첩보물이라기보다는 어떤 인간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그 장면이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구조 과부하의 아쉬움
7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라면 이야기 구조도 탄탄할 거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고 나니 그게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베를린의 초반은 솔직히 꽤 버거웠어요. 마카오, 베를린, 무기 거래, 암살, 망명까지 여러 국가의 인물과 사건이 짧은 편집 안에 동시에 쏟아집니다. 감독 본인도 편집 후에 인물 소개 자막을 급하게 추가했다고 밝혔는데, 그 사실 자체가 이야기가 과부하 상태였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국정원 요원 정진수 캐릭터가 원래 시나리오에 없던 인물이었다는 것도 이 맥락에서 눈에 걸렸습니다. 투자 유치를 위해 추가됐다는 배경이 영화 안에서도 그대로 느껴졌어요. 표종성과 동명수의 대결 구도에 집중됐다면 훨씬 날카로운 영화가 됐을 텐데, 정진수가 끼어들면서 이야기의 밀도가 분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지현 배우의 연정 캐릭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 미인계 공작원이라는 설정과 임신이라는 개인적 사연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인물인데, 두 가지 모두 충분히 파고들지 못한 채 종성의 이야기를 위한 배경으로 소비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감독이 전지현 배우를 의도적으로 고립시켜 쓸쓸한 표정을 끌어냈다고 했는데, 그 감정은 스크린에 분명 담겼습니다. 다만 그 감정이 이야기 안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채 흘러가 버렸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관객 분석에 따르면 한국 첩보 액션 장르 영화에서 관객 만족도는 액션 연출보다 인물 감정선의 완결도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700만을 넘겼음에도 "아쉽다"는 말이 계속 따라붙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수 있어요.
잘 만든 요소들, 그리고 결말
베를린에서 잘 만들어진 요소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핸드헬드를 배제한 픽스 카메라 액션 연출로 높아진 가독성, ITF 태권도 기반의 북한 격투 방식이라는 구체적 설정, 메소드 연기와 본능형 연기의 충돌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긴장감, 갈대밭 장면처럼 액션이 아닌 감정으로 승부한 순간들, 필름 룩을 구현하기 위해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습니다. 여기서 필름 룩이란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했음에도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노이즈와 그레인을 남기는 후반 작업 기법이에요.
문제는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독립된 볼거리처럼 배치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에요. 류승완 감독은 라트비아를 베를린으로 둔갑시키고 세트장을 현지와 똑같이 재현하는 탁월한 제작 감각을 보여줬지만, 그 공들인 그릇에 담긴 이야기의 밀도는 아슬아슬하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결말에서 종성은 블라디보스토크행 편도 티켓을 끊으며 정희와 함께 탈출을 시도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이 갈대밭을 빠져나와 국경을 넘는 마지막 장면은, 첩보물의 결말치고는 유독 조용하고 쓸쓸했어요. 화려한 승리도 통쾌한 복수도 없이 그냥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한 결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담담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한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베를린은 잘 만든 장르 영화이면서 동시에 조금 더 욕심을 냈다면 훨씬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그 아쉬움이 오히려 이 영화를 계속 떠올리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 같아요. 비슷한 결의 한국 첩보 액션 누아르를 찾는 분이라면 〈베를린〉을 보기 전에 먼저 류승완 감독의 전작 부당거래를 보는 것을 권합니다. 이야기의 밀도 면에서 비교해보면 이 감독이 어떤 조건에서 더 날카로운 작품을 만드는지 윤곽이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