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1,298만 관객. 2012년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1,200만을 돌파한 기록입니다. 솔직히 처음 극장 들어갈 때는 "배우 구경이나 하지"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조금 다른 감정이 남았습니다.
최동훈표 연출 문법
최동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쌓아온 연출 문법을 가장 정교하게 구현했습니다. 핵심은 액션과 대사 사이의 템포 제어인데, 업계에서는 이를 편집 리듬(editing rhythm)이라고 부릅니다. 편집 리듬이란 장면과 장면 사이, 혹은 대사와 동작 사이에 얼마나 호흡을 넣을지를 결정하는 편집상의 흐름으로, 관객이 영화를 '빠르다' 혹은 '늘어진다'고 느끼는 데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이 감독은 대사와 행동 사이에 '마(間, 포즈)'가 끼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로 유명합니다. 실제로 연기의 베테랑인 김혜숙 배우조차 이 영화를 찍고 나서 대사와 액션을 빠르고 정확하게 연결하는 감각이 훨씬 향상됐다고 털어놓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보면서도 장면 사이에 끊기는 느낌이 없었던 게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건 분할 화면(split screen) 기법의 활용입니다. 분할 화면이란 하나의 스크린을 두 개 이상의 구역으로 나눠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보여주는 시각적 연출 기법입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에서도 썼던 방식인데, 도둑들에서는 여기에 플래시백(flashback) 구조를 결합해서 서사의 층위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플래시백이란 현재 시점에서 과거 장면을 삽입해 캐릭터의 동기나 관계를 설명하는 서사 기법인데, 이 영화에서는 총 다섯 번의 플래시백을 배치해 각 캐릭터의 과거를 조각조각 제공합니다.
캐릭터 설계: 밥 먹고 꿈꾸는 도둑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넘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연출이었습니다. 배우들이 끊임없이 뭔가를 씹고, 먹고, 마시는 장면. 이건 캐릭터 리얼리티(character reality) 구현 전략입니다. 캐릭터 리얼리티란 관객이 허구의 인물을 실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행동을 의도적으로 삽입하는 연출 방식입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서양 속담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무슨 음식을 먹는지 이야기하면, 당신이 뭘 하는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도둑들도 기본적으로 밥 먹고 꿈꾸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관객에게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었던 겁니다. 제 경험상 이게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인물들을 미워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캐릭터별 핵심 특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예니콜(전지현): 이기적이고 해맑은 도둑. "남들 돈 벌었다 얘기 하지도 마. 나 아니면 다 쓸데 없으니까." 이 대사 하나로 캐릭터 전체가 설명됩니다.
- 씹던껌(김혜숙): 껌을 붙여 빛을 차단하는 기술자. 꿈을 파는 코믹한 장면이 후반부 비극으로 연결될 때의 복선 구조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잘 설계된 지점입니다.
- 마카오 박(김윤석): 분장 속에서도 눈빛 하나로 무게감을 만들어내는 캐릭터. 보지 않고 금고를 돌리는 씬에서 팔이 빠질 것 같았다는 후일담은 배우의 진지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 펩시(김혜수): 꽃과 나무 배경 속에서 도드라지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인물.
제가 직접 여러 번 돌려봤는데, 캐릭터마다 집중해서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연기 디테일이 계속 새롭게 보입니다. 특히 뽀빠이가 당황해서 삑사리 내는 장면 같은 건, 대본에 없는 인간적인 순간이라 보면 볼수록 좋습니다.
천만 흥행의 구조
도둑들의 흥행 공식은 한 마디로 앙상블 캐스팅(ensemble casting)의 승리입니다. 앙상블 캐스팅이란 단일 주인공 중심이 아닌 여러 주요 인물이 동등한 비중을 나누는 캐스팅 구조로, 관객이 각자 선호하는 캐릭터를 따라가며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듭니다.
전지현, 김혜수, 김윤석, 이정재, 김혜숙, 오달수, 주진모, 이정재까지. 이 면면이 한 화면 안에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화제였고, 실제 관객 동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이 영화는 2012년 8월 개봉 이후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습니다(출처: KOBIS 박스오피스 통계).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캐스팅 구조가 동시에 가장 큰 한계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배우진을 모아놓고 정작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서사를 가져가지 못한 채 결말로 내달립니다. 씹던껌의 꿈 복선은 뒤통수를 치는 감정을 줬지만, 마카오와 펩시, 체의 관계는 플래시백만으로 설명하기에 너무 얕습니다. 5분짜리 과거 장면으로 15년 관계를 설명하려는 건 무리입니다.
배우들 개개인의 연기 내공은 흠 잡을 데가 없었고, 작명 센스도 탁월했습니다. 씹던껌, 예니콜, 뽀빠이. 캐릭터 이름만 들어도 그 인물의 성격이 바로 떠오를 정도니까요. 그 덕분에 영화 보는 내내 인물들이 귀에 쏙쏙 박혔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매력적인 것과 그 인물의 내면이 충분히 그려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도둑들은 분명 즐거운 영화입니다. 두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빠르고 화려하고, 배우들의 눈빛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다시 볼 때마다 각 캐릭터에 집중하면 첫 번째 관람 때 놓친 연기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다만 보고 나면 묘하게 허전한 감각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가 이 정도 허전함을 남긴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이 영화의 배우들과 연출이 그 빈틈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한 번쯤 캐릭터 하나를 정해놓고 집중해서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