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멜로 영화 역대 흥행 1위. 저도 처음 이 수식어를 보고는 '그 정도야?' 싶었어요. 그런데 다시 보고 나서 오래된 연락처를 뒤적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좋은 영화냐는 질문과 기억에 남는 영화냐는 질문의 답이 꼭 같지 않다는 걸, 이 영화가 증명합니다.
건축학개론 버스 장면이 남기는 것
건축학개론영화는 배우배수지를 국민 첫사랑으로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하지요, 건축학개론은 서울예술대학교 음대생 서연과 건축학과 신입생 승민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은 대사도, 특별한 사건도 없어요. 그런데 저는 그 장면에서 가장 오래 멈췄습니다. 이어폰 한쪽을 건네는 행동,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는 구도. 일반적으로 영화적 감동은 극적인 대사나 사건에서 온다고들 하지만, 제 경험상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아무 말도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영화 문법으로 보면 미장센(mise-en-scène)의 전형적인 활용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공간 구성 등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 기법이에요. 건축학개론의 버스 장면은 대사 없이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과 설렘을 동시에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누구나 비슷한 장면 하나쯤은 기억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공명이 크게 느껴집니다.
감성이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감성이 진짜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더 복잡해졌어요. 감정이 움직였을 때, 내가 영화에 공감한 건지 아니면 그냥 설계된 장치에 반응한 건지 스스로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영화를 보면서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는 살면서 애틋하고 풋풋했던 그 감정을 그리워했을거같다라는 느깜을 받았어요
첫사랑 판타지가 덮어버린 것들
건축학개론에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솔직히 따로 있습니다. 승민이 잠든 서연에게 키스하는 장면이에요. 극 중에서도 친구가 "그건 범죄야"라고 직접 말할 만큼 문제적인 행동인데, 영화는 이를 웃음 코드로 처리하고 '풋풋한 첫사랑의 에피소드'로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동의 신체 접촉을 낭만화하는 서사 구조입니다. 비동의 신체 접촉이란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신체적 접근을 뜻하며, 현행법상 성추행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영화를 첫사랑의 감성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들 평가하지만, 저는 그 평가 뒤에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는지가 신경 쓰였어요. 서연은 영화 내내 승민의 시선으로만 그려집니다. 현재 시점에서 결혼을 앞둔 서연이 전 남자에게 집 설계를 의뢰하며 감정의 여지를 흘리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이를 '운명적 재회'처럼 포장하지만, 서연 자신의 맥락과 내면은 거의 설명하지 않아요.
이런 구조를 영화 비평에서는 남성 응시(male gaze)라고 부릅니다. 남성 응시란 카메라와 서사가 남성의 시선과 욕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여성 인물이 독립적인 주체가 아닌 남성의 감정을 완성시키는 대상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1975년 논문에서 처음 체계화한 개념으로, 이후 한국 멜로 영화 분석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이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어요. 그녀는 승민의 기억 속에서만 선명하게 존재할 뿐, 독립적인 인물로서의 서사가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건축학개론이 보여주는 문제적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동의 키스를 낭만적 첫사랑 에피소드로 서술하는 방식
여성 인물(서연)이 남성 주인공의 감정 완성에만 기능하는 서사 구조
서연의 이기적인 행동(결혼 앞두고 전 남자에게 감정 흘리기)을 비판 없이 아련하게 미화하는 연출
'첫사랑'이라는 감성 코드가 위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구조
그럼에도 감정이 움직였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걸 알면서도 감정이 움직였다는 겁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버스 장면에서 멈췄고, 첫눈 약속 장면에서도 마음이 흔들렸어요. 제 경험상 이런 불편한 감정은 단순히 '나쁜 영화에 속은 것'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건드린 감정이 진짜였기 때문에 더 복잡해집니다.
영화에서 감정 이입(emotional identification)이 일어나는 과정은 인지과학과 영화학 양쪽에서 오래 연구된 주제입니다. 감정 이입이란 관객이 스크린 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 인물의 감정을 실제처럼 경험하는 심리 현상이에요. 국내 영화 관람 행동 연구에 따르면, 관객의 감정 몰입도는 서사의 논리적 완결성보다 인물의 감정 진정성에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건축학개론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서사 구조의 문제와 별개로, 그 안에 담긴 감정만큼은 가짜가 아니에요. 저도 직접 다시 보면서 확인했습니다. 불편한 장면에서도 감정이 움직였고, 그 사실이 또 불편했습니다. 감성과 윤리가 꼭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는 그걸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건축학개론은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영화냐고 묻는다면 부정하기도 어려워요. 이 영화를 다시 볼 계획이 있다면, 감성에만 기대지 말고 서사 구조를 의식적으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불편함을 알면서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